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얄타 회담 (문단 편집) === 한국 관련 === 이 회담이 한국과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속내를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회담에서 미국은 당시 [[일본 제국]]과 서로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에게 [[만주 전략 공세 작전|대일전 참전]]을 약속받았고 이로 인해 일제 패망 후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점령되는 계기가 마련된 회담이기 때문이다. 당시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 참여를 대가로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상실했던 영토인 남사할린 등을 요구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원폭이 개발되기 전이라 소련의 협력이 절실했던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각국 정상은 서로 다른 목적을 두고 독립 문제를 논의했다. 일단 루스벨트는 새로운 세계대전을 피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하였다. 그래서 한국을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열강들의 이권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신탁통치]]라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 합의 내용은 구체적인 조항을 논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 독립 시에 미영중소[* 루스벨트는 당시 중국(중화민국)을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의 파트너로 여기고 있었다.]가 다 같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협력하자 정도의 추상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기 때문에 더 논하는 것은 소설의 영역이긴 하다. 애초에 이 회담에서 한국 이슈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안도 아니었고. 한편 [[스탈린]]은 한국 자체에 관심을 두기보다 일본의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한국 문제를 조망했다고 한다. 그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독일이 매우 빠른 속도로 세력을 회복해서 소련을 비롯한 전세계에 위협이 되었던 것을 잊지 않았고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를 패배시킨 전적이 있는 일본 역시 잠재적인 소련의 적이 될 것이 두려워 일본에 대해 강한 견제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고로 소련이 한국 문제를 다루면서 가장 핵심적으로 바라본 점은 한반도에 일본을 견제할 [[친소]]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1918~1922년간의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일본 제국에 의해 시베리아를 실질적으로 빼앗겼다는 사실을 본다면 소련이 이를 갈 만했다. 이 회담이 끝난 지 몇 개월 후 [[이승만]]은 1945년 4월부터 열린 [[UN]] 창립총회에 참관인 자격으로라도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보장을 받으려고 했으나 중국은 물론 미국조차 극심하게 분열된 한인들의 대표성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는 사무국과 각국 대표들에게 [[카이로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할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으나 이것도 소용이 없었다. 이후 이승만은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 이승만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라는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소련인]] 내부자가 제공한 소스에 기반하여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는 미·영·소 3국 간의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당시 국제 여론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a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1988, 新太陽社, p. 301-302] 에밀 구베로라는 인물이 제공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을 태평양전쟁 후까지 소련의 세력하에 두되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영 양국은 한국 독립에 대해 아무 공약도 하지 않기로 약속되어 있다. 미국이 소련의 요구에 제한을 가할 것을 결정짓지 않는다면 한국의 운명은 명백히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스태디니어스 미 국무장관은 오히려 연립정부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한 한국 대표들의 배후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분망하고 있다.[*a ] 이 폭로 이후 세계 언론과 미영 정계에서는 이 문제가 새로운 파문으로 등장하였다. 보도기관이 이 사실을 반복하여 기사화하자 결국 영국 하원이 이 문제를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실여부를 따지는 한 의원의 질문에 대해 [[윈스턴 처칠|처칠 수상]]은 얄타에서 비밀 협정은 없었고 많은 문제가 토의되긴 했으나 모두가 일반적인 것 뿐이었다고 애매모호하게 답변하였다.[*a ] 또 [[이승만]]은 한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또다시 비밀 협약의 희생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설령 이승만의 폭로가 근거가 빈약하더라도 그는 이 효과를 통해 최소한 강대국들이 자기들 맘대로 카드놀이하는 것에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어 보려고 최대한 어그로를 끌면서 시끄럽게 이슈화시켜 볼 작정이었다. 결국 당시 이승만은 또 미국이 소련과 뒤에서 딜쳐서 한국을 소련 치하에 넘길 것을 가장 크게 우려했다.] 1945년 5월 14일 [[이승만]]은 미 상원의원 오웬 브루스터, 월터 F. 조지와 미 하원의원 클레어 E. 호프만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電文)을 보냈다. >나는 귀하가 친우가 한 조언에 의하여 귀하에게 다음과 같은 정보를 보내니 용기있는 정치가가 이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폭로할 것을 호소합니다. [[해리 트루먼|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에 맡긴다는 비밀 협정에 관하여 보고를 받았다는 것은 얄타 협정에 관한 정보의 근거로 보아 확실합니다. 이 비밀 협정은 미·영·소에 의하여 서명되고 대일 전쟁이 종결할 때까지 한국을 소련에게 맡기고 미·영 양국은 한국 독립에 대한 공약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 자유를 약속한 [[카이로 선언]]과 대조될 수 있는 이 협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귀하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바입니다. 이 비밀 협정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국제연합]]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br][br]위에 폭로한 사실은 [[소련]]이 극동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미국]]이 소련의 요구에 제한을 가하지 않는 한, 소련의 정책은 한국의 운명을 종식시킬 것입니다. 스터티니어스 국무장관은 이와같이 버림받은 한국 문제의 토의를 거부하고 배후 조사를 위한 시간만을 요구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초 이 협정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대통령은 백악관을 통하여 겨우 사실을 알았고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민은 한국이 국제연합 총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조정하여야 한다고 권고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일순, 일각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이와같은 과오를 바로잡기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을 미국민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바입니다.[*b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 新太陽社, pp. 246-247] 더불어 그는 신문 기자들을 모아 이 '내밀한 약속'을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당시 [[유엔]]에 관한 뉴스가 적었으므로 기자들은 이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그에 대하여 국무성은 정식으로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계속하여 반복되는 비난으로 인해 [[백악관]]에서도 성명서를 발표했다.[*b]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